1894년 9월, 파리 근교 뱅센의 박람회장. 스물일곱 살의 샤를 파테(Charles Pathé)는 에디슨의 축음기 시연을 보고 매료된다. 700프랑을 빌려 축음기 한 대를 사들인 그는 다음 박람회에서 시연료 20상팀씩을 받았고, 단 하루 만에 200프랑을 벌었다. 이 사업적 본능이 네 형제 — 샤를, 에밀, 테오필, 자크 — 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다.
1896년 9월 28일 파리에서 창립된 파테 형제(Pathé Frères)는 축음기 회사에서 출발해 불과 10여 년 만에 세계 최대의 영화 장비 제조사로 성장한다. 1902년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 설계권을 인수한 파테는 자체 카메라, 영사기, 필름 원료(이스트먼 코닥의 독점을 깨뜨림)까지 생산하며, 1908년에는 촬영부터 배급까지 완전한 수직 계열화를 달성했다. 전성기에는 전 세계 영화의 약 60%가 파테 장비로 촬영되었고, 40개 이상의 해외 지사를 운영했다. 울어대는 수탉(le coq) 상표와 "나는 크고 분명하게 운다(Je chante haut et clair)"는 슬로건은 100년 넘게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영화 상표 중 하나다.
가정용 영화 분야에서도 파테는 선구자였다. 1912년 출시한 KOK 28mm 시스템은 불연성 셀룰로오스 아세테이트 안전 필름을 사용했고, 손잡이를 돌리면 자가 발전으로 빛을 만들어내는 혁신적 설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에디슨의 가정용 영사기가 4,600대 중 500대밖에 팔리지 못한 반면, 파테스코프는 8,000대 이상 판매되었다.
1922년 12월, "집에서 즐기는 영화(le cinéma chez soi)"를 슬로건으로 내건 파테 베이비(Pathé Baby) 9.5mm 시스템이 등장한다. 가정용으로 설계된 9.5mm 필름 규격은 코닥의 16mm(1923)과 함께 수십 년간 아마추어 영화의 표준이 되었다. 전후에는 위보(Webo) 카메라 시리즈가 이어졌고, 소피아 로렌과 찰턴 헤스턴이 직접 위보 16mm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샤를 파테는 이미 자산 매각을 시작했고, 이 결정은 프랑스 국내에서 큰 반발을 불렀다. 1929년 베르나르 나탕이 경영권을 인수했으나 코닥, 볼렉스, 일본 제조사들과의 경쟁 속에 장비 부문은 서서히 쇠퇴했다. 1968년, 파테는 시네카메라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다 — 같은 해 코닥도 마지막 16mm 카메라를 단종시켰으니, 한 시대의 종막이었다.